[STORY]맨시티와 오아시스 (Noel Gallerger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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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와 맨시티는 땔래야 땔 수 없는 사이. 이미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유명한데요.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서 찾아보던 중 괜찮은 인터뷰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카페 [City Magazine]에서 찾은 자료로 2009년 올라온 글 입니다. 출처는 글 하단에 있으니 궁금하신 점은 직접 찾아보셔도 좋을것 같습니다. 최근 기사를 찾아보면 얼굴이 만신창이가 되는 와중에도 맨시티의 리그 우승을 축하했다는 기사



Matt Mcnulty//Manchester City Fc/Getty Images/


맨체스터 시티 FC(이하 맨시티)가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2회 연속 우승을 달성한 가운데, 전설적인 록밴드 오아시스의  '노엘 갤러거' 부상 소식이 눈길을 끌고 있다. 지난 23일 아스톤 빌라를 상대로 2021-22시즌 EPL 최종 38 라운드 홈 경기에 나선 맨체스터 시티는 최종 스코어 3-2로 승리를 거머쥐며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평소 맨체스터 시티의 ‘골수팬’으로 잘 알려진 노엘 갤러거는 에티하드 스타디움 스카이 박스에서 경기를 관람했다. 이날 맨시티는 0-2로 뒤쳐지고 있었지만 후반에 3골을 몰아치며 경기를 뒤집는데 성공했다. 골이 터진 직후, 미친듯이 환호하던 노엘 갤러거는 현장에 있던 맨시티의 수비수 '후벵 디아스'의 아버지와 충돌했다.

<BBC>는 <토크스포츠>와 노엘 갤러거의 인터뷰를 인용하며, 부상당하던 당시를 설명했다. 그는 역전골이 들어가자 “나는 나는 바보처럼 뛰어다니고, 프리미어 리그 트로피처럼 내 아들을 이리저리 들어 올렸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다 '노엘'은 '후벵 디아스'의 아버지와 부딪혀고 바닥에 피를 흘릴 만큼 얼굴은 만싱창이가 됐다. 부상을 입은 '노엘 갤러거'는 두 눈에 멍이 들었고 입술을 꿰매야 했지만, 복도를 내려가던 도중 '펩 가르디올라' 감독을 만나 우승의 기쁨을 나눴다고 전해졌다.


출처 : https://hypebeast.kr/


Interview


D : 멘체스터시티와 노엘과의 연결고리가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나요?

Noel : "내가 처음으로 본 경기는 메인 로드에서 뉴캐슬을 5-1로 이긴 경기였는데, 나는 1971년으로 기억하고 있었지만 최근에 찾아보니 사실은 1975년 1월이었어. 나는 당시에 일곱 살이었고, 내가 그 경기에서 유일하게 기억하는 골은 말콤 맥도날드(Malcolm Ian Macdonald, 1950년 1월 7일 ~ )가 크로스바 바로 아래쪽을 치고 들어오는 슛으로 성공시킨 뉴캐슬의 골이야. 아주 생생하게 기억해. 나는 모든 인터뷰에서 이 경기를 내가 본 첫 경기라고 말했고, 그래서 정말 그 경기가 1971년에 있었던 것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싶었지. 하지만 우리가 뉴캐슬을 그 스코어로 이긴 건 1975년뿐이었어. 아마 내가 그 전에도 경기장에 간 적은 있었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첫 경기는 그거야."



D : 모든 가족이 맨시티를 응원하는건가?

1970년 중반의 갤러거 가족. 왼쪽부터 노엘, 폴, 리암, 페기 DAN CALLISTER/GETTY


Noel : 우리 가족(아버지, 노엘, 리암, 폴)만 제외하고 아일랜드 혈통의 아버지 쪽 가족들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응원했어. 

아버지가 왜 맨시티를 응원하기로 했는지는 잘 모르겠어. 내 생각에는, 무척 낭만적이게도, 맨시티가 바로 우리 동네의 팀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 우리는 롱사이트에서 태어났고, 짐작하겠지만 주변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맨체스터 출신이 아니었지. 롱사이트에서 메인 로드까지 30분이면 걸어갈 수 있었어. 일곱 살짜리는 어느 쪽에 서야 할지, 어느 팀을 응원해야 할지 잘 모르지만, 경기를 보는 게 매력적이라는 사실은 확실히 알지. 

키팩스(역주: 메인 로드 구장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서포터 좌석) 끝부분, 꼭대기의 창고로부터 경기장으로 내려가는 길까지 난간이 이어지는 사이에 공간이 있었어. 모든 아버지들이 거기다 애들을 데려다 놓았고, 우리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지. 주변에는 내 또래 애들이 잔뜩 모여 있었고 하프타임이나 풀타임 후에 아버지가 왔어. 그게 다야. 다른 건 없어.

 

아버지가 우리를 매주 데려가진 않았어. 하지만 그 후 압도적으로 맨시티의 앞마당이라 할 만한 '버니지'로 이사했지. '롱사이트'의 성 '로버트 거리'에서 '버니지'의 성 '버나드 거리'로 이사한 거야. 그리고 그곳에서 모든 것이 시작됐어.

맑은 날 밤에는 새 집의 내 침대에서 '메인 로드'의 야간 조명을 볼 수 있었는데, 맨시티가 주중에 경기를 하면 나는 '피카딜리 라디오'로 경기 중계를 틀어 놓고는 멀리 야간 조명을 바라보면서 생각했어. '저기서 경기를 하고 있다. 모든 게 이루어지고 있다.' 경기 중계 사이에 '골이다!' '안 돼!' 같은 외침들이 끼어들곤 했는데, 나는 맨시티가 골을 먹었을 때의 '안 돼!' 소리를 두려워했지."


D : 그럼 경기도 많이 보셨나요?

Noel : 처음으로 우리끼리 경기를 보러 갔던 건 '버니지'의 중학교에 입학했을 즈음이었던 것 같아. 몇 명이 같이 다녔는데, 한 예닐곱 명 정도였고 1시간 정도 걸어서 '메인 로드'까지 걸어갔어. 10대 초반의 일이야. 

"12살부터 21살 때까지는 완전히 종교 수준이었어." 그가 회상한다. "우리가 하위 리그로 떨어진 1983년 이후 첫 시즌에는, 홈이든 어웨이든 매 경기에 다 갔어. 그 당시에는 축구 팬들이 원정 다니는 게 상당히 편했지. 우리 중 절반은 실업자였기 때문에 메인 로드 입장권도 반값이었고, 인터 시티 특별열차도 싸게 탈 수 있었거든. 그래서 80년대 초반에는 경기 쫓아다니는 게 그렇게 비싸지 않았지. 지금은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의 2부 리그에서는 대부분의 팀이 북쪽 지방에 위치하고 있었어. 일주일 내내 할 일도 없었으니, 기차를 타고 허더스필드, 브래드포드, 반슬리 등으로 이리저리 놀러 다니는 건 무척 쉬운 일이었지."

"메인 라인 크루, 영 거브너스, 언더 파이브스(역주: 잘은 모르겠지만 훌리건 조직인 듯;;) 같은 곳에도 아는 사람이 있었어. 그 중 몇 명은 아직도 만나고. 정말 미쳐 돌아가던 시절이었지. 그 당시 축구가 오늘날에 비해 어땠는지 생각해 보면, 거의 선사 시대 수준이라고나 할까. 요즘 구장들은 다 번쩍번쩍 빛나지. 하지만 20년 전의 그라운드, 특히 리즈의 야간 경기쯤 되면 무척 위험했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 고민될 정도로. 그게 다 성장 과정의 일부였다고 생각해."


D : 축구를 많이 좋아하신것 같은데, 혹시 록스타 말고 축구선수의 꿈도 있었나요?

Noel : "버니지에는 '갤러거의 역할'이란 것이 있었던 것 같아. 클로드 마켈렐레가 첼시에서 같은 역할을 만들어내기 전까지는. (역주: 마켈렐레는 최초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분류되며, 그래서 수비형 미드필더를 '마켈렐레의 역할(Makélélé Role)'이라고도 합니다.) 그가 내게서 타이틀을 빼앗아 갔어. 나는 그 역할이 탄생하기 전부터 수비형 미드필더였다고. 아니, 내가 그 역할을 만든 거지. 센터 포워드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골도 많이 넣었지만, 미드필드에 있어야 공을 더 많이 잡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 나는 수비를 하거나 최전방에 있기에는 몸집이 너무 작았고, 그래서 중간 어디쯤에 있기로 했지. 물론 리암은 주워 먹기나 잘하는 놈이었고."


D : 당신이 좋아하는 축구선수가 있나요?

"콜린 벨(Colin Bell), 데니스 튜어트, 마이크 서머비(Mike Summerbee), 게리 오언, 스티브 맥켄지(Stephen MacKenzie), 폴 파워(Paul Power), 조 코리건(Joseph Thomas Corrigan) 같은 선수들을 볼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어. 하늘색 라운드넥 유니폼을 입고 뛰던 우리들의 모습이 생각나. 내 영웅은 처음에는 벨이었고, 그 다음은 튜어트, 그러고는 피터 반스(Peter Barnes), 그 후로는 약간 갈등이 있었고. 그러고 나서 배리 실크만(Barry Silkman)이 등장했어. 그는 속임수의 달인이었는데 나는 그를 싫어하지 않았어. 그 뒤로는 아마 폴 스튜어트(Paul Stewart)겠지. 그는 수년만에 처음으로 20골을 넣은 스트라이커였고, 우리는 곧바로 그에게 빠져 버렸어. 난 데이비드 화이트(David White)는 좋아하지 않았어. 아예 순위에 두지도 않았다고. 그리고 조지 킨클라제(Georgi Kinkladze) 이후 알리 버나비아(Ali Benarbia)와 션 라이트필립스(Shaun Cameron Wright-Phillips)가 나올 때까지, 그 사이에는 영웅이 없었어."



D : 혹시 맨체스터시티에 세레나데를 선사하기 위해 Kippax를 소재로 한 노래를 만들지는 않았나요?


(Kippax 는 Manchester City 의 Maine Road 그라운드 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고 보컬이 활발한 계단식 스탠드 중 하나였습니다 . 1923년 경기장이 개장했을 때 원래 "Popular Side"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1956년 클럽이 팬들을 비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지붕을 지을 수 있는 계획 허가를 얻었을 때 이름이 변경되었습니다.  Kippax Street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습니다. Kippax는 당시 더 흔했던 것처럼 두 골 중 하나 뒤에 위치하지 않고 경기장의 한쪽 길이를 달리는 테라스 라는 점에서 독특했습니다.

1994년 여름, Hillsborough 참사 이후 발표된 Taylor Report 로 인해 Kippax가 철거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올인원 스탠드가 세워졌습니다. 이 새로운 스탠드는 18개월에 걸쳐 단계적으로 완성되었으며 1995년 10월 시티의 전설인 Bert Trautmann 에 의해 마침내 개장되었습니다. 이 스탠드는 10,178개의 좌석 팬을 수용했으며 3단으로 구성되어 당시 미국에서 가장 높은 스탠드였습니다. 클럽은 2003년 5월 메인 로드를 떠나 시티 오브 맨체스터 스타디움으로 이전했습니다 . 오래된 경기장은 2004년 초에 철거되었습니다. 비공식적으로 새 경기장의 이스트 스탠드는 The Kippax라고도 합니다.)



"그런 거 없어." 그가 웃는다. "술 마시고 키팩스에 앉아 있다가 노래를 한 곡 시작한 적은 있었지. 아마 이렇게 시작했을 거야. 'Everywhere we go...' 아마 내 작곡의 씨앗은 키팩스 뒤쪽에 앉아 있을 때 뿌려졌을걸. 싱얼롱을 좋아하게 된 게 그때부터거든."

70년대에 키팩스 뒤쪽에서 몸을 흔들던 것이 노엘에게 영감을 주었든 아니든, 기타를 배우기로 결심하고, 당시 북서 지방을 장악하고 있었던 로컬 밴드에서 경험을 쌓은 뒤, 리암의 밴드였던 레인에 합류함으로써 스타덤을 향한 그의 길은 시작되었다.

 

"우리는 1991년에 오아시스를 시작했고, 그 전에 나는 인스파이럴 카펫츠에서 로디를 하고 있었지." 그가 말한다. "그레이엄 램버트를 비롯한 밴드 대부분이 올드햄 팬이었어. 내 기억에 클린트 분은 별로 그런 것 같지 않았지만. 어쨌든 나는 올드햄 팬이란 사실상 맨시티 팬이라고 생각해. 내가 만난 올드햄 팬들 중에 '음, 사실 난 맨시티를 응원하지만, 그 동네에서 너무 멀리 살아.'라고 말하지 않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거든. 내가 그들을 처음 만났을 때는 우리 팀이 1부 리그에 있었지만, 뭐 계속 오르락내리락 하는 거였으니까. 하지만 우리가 올드햄을 홈에서 만나기만 하면 언제나 졌어. 한 번의 예외도 없이."


D : 당신이 어느 인터뷰에서 레논/매카트니를 좋아한다고 들었어요. 혹시 리버풀 팬이 되는 것도 고려해봤을것 같은데..

 
Noel : "사실 말이야," 그가 말한다. "우리 아버지는 리버풀에서 일한 적이 있고 이따금 안필드에도 갔었어. 난 리버풀 팬인 친구도 많고 리버풀 시민들도 좋아하지만, 그래도 솔직히 말해야겠지. 리버풀 축구팀은 내 신경에 거슬리고, 특히 지난 10년간은 더 그렇다고.

그들은 계속 돈을 낭비해 왔지만, 제이미 캐러거(Jamie Carragher)와 스티븐 제라드(Steven George Gerrard)라는 두 명의 좋은 선수 덕분에 살았지. 지금은 페르난도 토레스(Fernando Torres)가 있으니 셋이군. 그들만 가지고 리그를 승리로 이끌어 간다고. 이 비호감은 70~80년대에 리버풀이 메인 로드에 오면, 그냥 1-0이나 2-0도 아니고 언제나 4-0으로 우리를 이겼던 것에서 시작된 것 같아. 홈에서 우리를 아주 짓밟아 버렸지."

"재미있게도, 몇 년 전 이비사에 갔을 때  Kenny Dalglish(리버풀의 전설적인 선수)의 아들을 만났거든. 폴과 나는 그 친구에게 '너희 아버지는 전설이셔.'라고 했고,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 전화할 때 내가 잠깐 통화할 수 있도록 해 주었어. 나는 경기 전에 그의 이름이 출전 명단에 뜨는 것을 두려워했었다고 말했고, 케니는 메인 로드에서 경기하는 걸 리버풀 선수들이 아주 좋아했다고 말했어. 경기장이 거대한 데다 근처에서는 최고 수준이었다나. 분위기는 언제나 끝내줬고 팬들도 환상적이어서 축구하기에는 정말 멋진 장소였고, 그래서 더 이상 그곳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수치라고까지 말하더군. 나는 다 좋지만, 맨시티 팬들은 전혀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지. 우리 팀은 그 경기장에서 뛰는 걸 전혀 마스터하지 못했으니까!"

 

아이러니컬하게도, 오아시스가 1996년 메인 로드에서 그들의 어마어마한 공연을 마친 직후 맨시티를 강등시킨 것은 다름 아닌 리버풀이었다.
그 당시, 클럽과 밴드는 서로를 홍보하고 서로에 대해 경의를 표현하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있었다. 사진 찍기 행사, 공연, 옷차림 등등... 음악과 축구는 하나가 되었고, 바야흐로 오아시스가 세계를 지배하기 일보직전, 그것은 양쪽에게 일종의 정략결혼과 같았다.


Noel : "아주 근사했어." 노엘이 말한다. "브라더가 맨시티의 스폰서가 되고, 신문지상에 우리 얼굴이 오르내리기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이 시작되었지. 사진기자들은 우리에게 브라더 로고가 새겨진 맨시티 셔츠를 입으라고 끝없이 주문했어. 그때가 클럽과의 진정한 연관이 시작된 시점이었던 것 같아. 우리가 그 셔츠을 입고 있는 유명한 사진을 케빈 커민스가 찍었지.

그러고 나서 첫 일본 투어를 갔는데 모두가 그 옷을 입고 있더라고. 그들은 그게 오아시스 셔츠나 뭐 그런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나중에 내가 프래니 리에게 맨시티 셔츠가 일본에서 얼마나 많이 팔렸냐고 물었더니, 주문이 넘쳐나서 클럽이 계속 메일을 보내는 중이라고 하더군. 공연에는 수백 명의 아이들이 왔는데, 그 중 몇몇은 브라더 로고만 새겨진 커다란 현수막을 만들어 왔더라고. 걔네들은 그게 밴드랑 무슨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하지만 걔네들이 셔츠의 클럽 배지에 그려져 있는 배와 붉은 장미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어. 아마 무슨 뜻인지 궁금해 했을 거야."


D : 그러니까 공개적으로 맨시티를 서포트하기로 한 것은 음반을 살 가능성이 있는 대중들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염두에 둔 오아시스 공동의 결정이었나?
Noel : "처음에는 적어도 맨체스터의 절반(역주: 맨유 팬들을 얘기하는 거겠죠?)이 단번에 멀어질 것을 걱정했어. 하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그들은 수많은 트로피를 갖고 있지만 우린 아무 것도 없어. 맨시티 팬들은 빈털터리였다고. 그래서 우리는 깃발을 당당히 내걸기로 했지."


D : 맨시티가 점점 멀리 미끄러져 나갈수록 관중이 점점 많아졌는데, 오아시스가 영향을 미친건가요?

Noel : "나는 언제나 그때가 맨시티의 부활 시점이었다고 생각해. 무슨 이유인지 시티 팬들 모두가 스스로를 쇄신시킨 것 같았거든. 나는 우리 팀의 인기가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3부 리그에 있는 팀을 4~5살짜리들이 응원하겠어? 학교에 가기만 해도 쪽팔렸을 텐데. 하지만 어떻게 된 건지 몰라도, 우리가 3부 리그에서 순위가 낮아질수록 관중은 점점 늘어났어. 오아시스가 그것에 영향을 미쳤는지는 나도 몰라.

당시에는 원정 경기에 많이 갔었어. 난 버킹엄셔에 살았고 맨시티는 위컴, 콜체스터, 레딩 같은 팀들과 경기했기 때문에 가는 게 별로 어렵지 않았거든. '좋아, 난 본머스에 가본 적이 없는데 내일 맨시티가 거기서 경기를 한다니, 내 평생 거기 가볼 수 있는 기회는 이번뿐이야. 그러니까 가야지.' 이런 식이었지."

 

D : 노엘의 영원한 영웅 중 한 명인 조지 킨클라제의 등장 또한 클럽의 순위 하락과 시기가 일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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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el : "킨클라제 같은 선수는 언제나 있었어. 단 하나의 빛나는 천재 말이야. 문제는 그런 선수와 함께 그가 제대로 뛸 수 있도록 보조해 주는 여섯 명의 선수가 더 필요하다는 데 있었어. 맨유에는 데이비드 베컴만 있었던 게 아니라 로이 킨도 있었고, 바로 그런 선수가 우리에게 필요했다고. 브라질 출신들이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도록 받쳐 줄 수 있는 누군가가.

조지가 처음 나왔을 때가 기억나. 클럽의 누군가가 내게 전화를 걸어, 그루지야 출신의 한 선수와 계약했다고 말했지. 난 그게 누구냐고 물었는데,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도 못하더군. 나는 그가 괜찮은 선수인지 물었고, 전화한 사람은 그루지야와 웨일즈의 경기 비디오에서 그가 상대를 완전히 갈가리 찢어 놓는 모습을 보고 클럽이 그를 사왔다고 했어. 나는 그의 데뷔전이 될 토튼햄 전을 보기 위해 런던으로 날아갔고, 논평 같은 걸 하고 있던 테리 베너블스(역주: 전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감독) 옆자리에 앉았지."

킨클라제의 데뷔전을 보고 난 뒤 노엘이 한 말은 유명하다. 맨시티가 유로 컵에서 우승하거나, 아니면 4부 리그로 강등될 거라고. 불행히도 그의 말은 거의 맞았다. 그것은 거의 실현될 뻔한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처음 킨키를 보았을 때 생각했어. '젠장, 이건 내가 본 가장 무시무시한 광경이거나 내가 본 가장 멋진 광경이다.'" 그가 웃는다. "어느 쪽인지 판단이 안 되더라고! 맨시티 팬이 아니면 이해 못 해."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에 알리 버나비아가 왔고, '얘는 누구야?' 싶었지. 지금 내 머리가 좀 지치긴 했지만, 현대 축구에서 내가 천재라고 생각한 사람을 고르라고 한다면 그건 알리일 거야. 내 생각엔 그가 션 라이트필립스를 세계적인 선수로 만들어낸 것 같아. 키건 감독 휘하의 알리와 션은 난폭했고, 실내 축구에서나 볼 수 있을 만한 플레이를 선보였지. 베르코빅, 알리, 라이트필립스, 그리고 션 고터가 있었던 시절의 팀은 내가 본 것 중 최고의 축구를 했어. 물론 하위 리그에서의 얘기지만. 어쨌든 당시의 우리는 놀라운 팀이었다고."




오아시스 음악을 좋아하다 보니, 멤버들의 취향이나 삶에 대해서도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앞으로 오아시스의 다른 정보들도 디깅해 볼 생각입니다. 사실 오아시스 인터뷰는 다른 아티스트들에 비해서 굉장히 많은 편입니다. 조금만 검색해보면 쉽게 찾을 수 있지요. 음악만큼 축구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다는것을 볼 수 있는 인터뷰였습니다.. 노엘 특유의 직설적이고 솔직한 인터뷰가 재미있었습니다.




출처 : https://m.cafe.daum.net/oasislife/6UyN/234?searchView=Y [시티매거진 - Oasis 칼럼/인터뷰]

글 그대로 옮겨오지 않고 약간의 설명과 자료를 곁들인 콘텐츠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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